[신앙컬럼] “산에 호랑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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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ry Bengal Tiger illustration in black lines

조선시대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자 그것을 반대하고 죽음을 택한 6명의 신하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택하지는 않았지만 세조와 같은 하늘 아래 살기 원치 않아 스스로 낙향한 6명의 신하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강직함과 불의에 대한 항거는 후대에까지 칭송을 받아 비석을 세우고 그들의 충절을 기립니다.

이런 강직한 사람들이 세상의 불의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 세상을 떠나거나 세상을 등지고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을 포기 하는 것은 세조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는 일입니다.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 자신의 강직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들의 강직함과 불의에 대한 분노는 존경할 일이지만 그런데 그것이 과연 최선의 길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조 개인에 대한 반대가 지도자와 학자로서 부여된 시대적 사명보다 더 중요했을까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누가 채우게 되었을까요? 호무호장(虎無狐長), 즉 호랑이가 없는 자리에 여우가 왕 행세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산 중에 왕입니다. 호랑이는 산의 질서를 유지하고 산의 동물들이 자신의 주어진 위치에서 살도록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호랑이는 자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우가 주제를 모르고 날뛰지 않습니다.

왜 여우가 왕 행세를 할까요? 호랑이가 자기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 때 여우가 왕인양 행세합니다. 욕심에 가득찬 여우는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산 중의 순진한 동물들이 입을 것입니다.

산 위에 무질서는 호랑이가 없는 탓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호랑이가 산을 떠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호랑이가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침묵하는 다수의 호랑이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산을 지켜야 합니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여우가 보기 싫어 ‘더러워서 왕 노릇 못해 먹겠다’며 산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그래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떠나서도 안됩니다.

강직함은 좋은 성품입니다. 불의에 대한 항거와 정의를 위한 투쟁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강직함으로 싸워야 합니다. 피하고 물러서면 여우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 결과 산은 무질서와 혼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떠나는 호랑이의 책임입니다.

‘악에게 지지말고 이기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빛이 없는 곳에 어둠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것은 빛의 책임입니다. 자꾸 어둠을 탓합니다. 아닙니다. 어둠을 탓할 것이 아니라 빛을 더 강하게 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워지는 세상을 더 밝혀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에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한 그 도시들을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곳에 조카가 살고 있었던 이유로 아브라함은 그 도시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의인 10명만 찾을 수 있다면 그 도시를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의인 10명이 없어서 결국 그 도시들은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되었습니다.

악이 많아진다고 불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로 의인 10명 중에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악이 많다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을 때 망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산을 지켜야 합니다. 침묵하는 다수가 이제 말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진실이 없으니까 거짓이 진실처럼 여겨집니다. 정통이 더 활발하게 일을 함으로써 이단이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의가 확고해야 불의가 틈타지 못합니다. 여우가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시드니 신학대학 천용석 교수